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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월간미술 2월호
인생은 Lo-fi
배우리 기자
조음사(調音師) 조병희
1968년 태어났다. 한성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밀레니엄 전까지 다수의 영상음악을 제작했으며, <최소천국>(1994),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1, 2>,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등 영화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 후 직장생활을 하고 일본 도쿄조리제과전문학교에서 조리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인디아트홀 공을 운영하며 전시 및 영상 설치의 사운드 작업을 했으며 <강릉국제영화제>(2019), <호민과 재환(2021 서울시립미술관), <영등포 네트워크 예술제)(2021), <우리소리 다큐멘터리>(2021, 우리소리박물관) 등의 사운드 협업을 맡기도 했다. 현재 인디아트홀 공은 쉬는 중이다.
20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낡은 공장 2층 한편에 '인디아트홀 공'(이하 공)이라는 예술 공간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10년간 운영되다가 2021년 <Move! Move! Move! Largo>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이곳을 발견하고 터를 닦은 조병희 대표는 '요리사'에 가까웠던 시절 공을 열었지만, 10년이 지나는 동안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의 자리로 돌아왔다. 2021년에는 전시와 함께 만든 노래들을 엮어 <Super Sad(지독한 슬픔)>라는 앨범을 내고, 지난 1월 19일, 공과의 이별을 마무리 짓는 앰비언트 음악앨범, <Various Farewell(여러가지 안녕)>을 발매했다. '공'이라는 공간이 특별한 건 이곳이 언제나 열린 공간과 열린 네트워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해결 방법을 고민한 <공포〉>, <공존>, <Move! Move! Move!> 등의 정기전도 공의 특별한 네트워크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미술가 무용가 퍼포머 배우 시인들로 늘 붐비던 곳이 사라진 건 슬픈 일이지만 조병희 대표는 나름대로 함께 하는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굉음을 내는 무서운 속도의 사회"에 맞설 수 있도록 "무효용의 느림과 침묵"(<Super Sad> 1번 트랙 <Slow & Silence>)을 무기로 삼은 채 말이다.
'여러가지 안녕'
2012년 여름, 그 공간을 찾았는데 거기 2층에 올라가있으면 너무 좋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섭지 않냐고 하는데 저는 밤에 혼자 있어도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어요. 한 반년은 청소하고 뜯어고치고 2013년 1월에 첫 전시를 했어요. 너무 좋아서 처음 6년 동안은 하루도 안 쉬었어요. 처음 반년 정도 했을 때는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도 했거든요. 40년 동안 만난 사람보다 6개월 하면서 만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다시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발매사에 음반을 넘기고 나니까 이제 공도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작년에 공간을 비워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때부터 준비한 거예요. 헤어짐에 대한 기억이나 단상들에 대해서 한곡 한곡 만들었어요. 앨범 커버는 서찬석 작가한테 부처님 얼굴이 있는 몽환적인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이별에 관한 곡을 만들려고 보니 석가모니가 떠오르더라고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이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물었는데 석가모니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고 했대요. 그냥 이별은 그런 게 아닐까. 이별이 있어도 그냥 나의 길을 가는 거니까.
20세기 '독고다이' 음악 활동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 교습을 받긴 했어요. 음악을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고, 음대를 지망하지도 않았어요. 중·고등학교 때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많이 듣기는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시절, 군대 가기 전까지, 제가 작곡을 배운 적도 없는데 밤에 잠을 못잘 정도로 뭐가 자꾸 떠올라요. 그때 악보에 곡을 엄청 많이 썼어요. 그렇게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운 좋게 단편 애니메이션 <빌보드사인>(1992) 음악 작업을 하게 됐어요.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이어폰으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계속 달리는거라 음악이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나오거든요. 그 일을 맡고 나서 계속 그런 일을 하게 됐어요. 그 시기가 1990년대 초인데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막 보급되고 CD가 장착되기 시작하면서 교육자료 같은 것이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그 안에 부수적으로 사운드가 들어가야 하니까 그 일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때 컴퓨터를 이용해서 음악을 만드는게 일반화된 거죠. 매킨토시 흑백 모니터로 된 거 그거 하나로 음악을 만들었어요. 1분짜리가 반복되는 음악을 한 달에 100곡씩 만들었어요. 돈 벌면서 저는 연습을 한 거죠.
궁금한거 있으면 책 사서 보면서 완전 독학으로 음악을 했어요. 일을 하면서 3, 4년 지나니까 음악하는 사람을 점점 많이 만나는데 음대 출신들 사이에서 음대를 안나온게 콤플렉스가 됐어요. 내가 작곡이라는 걸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저 사람들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즐거워야 할 시간인데 항상 심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거의 마지막 작업이에요. 그 이후에 더는 할 게 없더라고요. 일 받는 것도 겁나고 그래서 2000년쯤 관뒀어요. 그때는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하는 음악이에요.
21세기 公적 음악 활동
공하면서 최근에 느낀 게 있는데 음악을 꾸준히 해야겠구나, 그리고 음대를 안 나와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거예요. 그전에는 콤플렉스 때문에 화성학이니, 대위법이니 찾아보면서 음악 구성 확인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아예 없어요. 작가들 작업을 보면 느끼는 것도 있고,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기니까 사운드 리뷰도 하는데 나 스스로가 재밌고 너무 편하더라고요. 이 일을 하는게 스트레스가 아니에요. 음악을 다시 할 줄 진짜 몰랐죠. 이렇게 생각이 바뀐 데는 공을 하면서 만난 천여 명의 예술가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 만나서 배운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결과물로써의 예술품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을 만들기까지 중간 과정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자주 만나 준비하는 과정을 봤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했어요. 위안을 주는 게 예술인지 삶인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동이 있어요.
혐오, 분노로 넘치는 세상인데 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해줄 수 있는 예술가들을 만난 게 다행이에요. 작년에 발매한 <Super Sad>는 공에서 전시한 몇몇 작가와의 협업 결과물, 조음사로 활동하면서 만든 곡을 선곡한 앨범입니다. 사회에 닥친 큰 재앙이나 슬픔에 공감하는 작업들에 대한 음악이죠. 인류애나 인간존중까지는 못가더라도, 소극적이고 개인적으로나마 슬픔에 공감하는 송가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거나 전 지구적 재난으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에게 음악으로 미력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해요
公적 음악
저는 비어 있는 음악을 좋아해요.
대중음악이라는 건 한 곡 한 곡으로 승부를 내야 하니까 꽉 차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거든요. 들었을 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런데 비어있으면 듣는 사람이 가져갈 몫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영상에 어울릴 음악을 찾아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분들한테는 심심하고 빈약하다싶은 정도의 음원을 찾아보라고 해요. 그래야 본인의 영상이 살거든요. 좋은 음악일수록 완성돼있으니까 들을 때는 좋아도 막상 영상에 넣으면 자기가 할 이야기를 음악에 끼워 맞추게 돼요.
제가 만드는 음악도 그래요. 소리가 많아도 그냥 소리일 뿐이에요. 그래서 열 번 들어도 기억이 안 나요. 감상을 말하기 어려워요. 주변 소음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주 정제된 드럼 소리, 잘 손본 기타소리와 목소리 이런 것들로 밸런스를 맞추고 곡을 만드는데 저는 밑에 잡음이 되게 많아요. 평범하게 곡을 만들고도 일부러 밖에 나가서 동네 길거리, 사람 떠드는 소리를 녹음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그 소리를 깔아놔요. 원래 있는 소리들이니까 자연스럽게 넣게 되더라고요.
억 단위로 자본이 투입되는 곡들은 주변에 우리가 잡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배제된 거예요. 저는 그런 음악산업에 끼지 못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거 같아요. 곡을 만들고 녹음하고 마스터링 하는 과정을 요리에 비유했을 때, 장봐오고, 요리하는 것까지가 곡 만들고 녹음하는 거예요. 마스터링은 플레이팅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잘해도 개인 장비로는 플레이팅이 잘 안 돼요. 플레이팅이 잘 돼야 사람이 백 번도 듣고 천 번도 지치지 않고 들을수 있거든요. 별 차이 안 나지만 사람들이 마스터링이 별로면 불편해서 듣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미 플레이팅이 안 되니까, 저는 이걸 장점으로 살려서 푸짐하게 주는 거예요. 이것도 재밌지 않니 하면서 잡음도 일부러 넣어요. 시간도 그래요 3분, 5분짜리는 만들기 싫어요. 이쯤에서 곡이 마무리되어야 하지 않나 싶을 때 끊지 않고, 두 시간짜리 전시장 음악도 만들어요
또 다른 공,
"소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생산자"
공과는 다른 이름, 다른 형태로 할 건데 어떻게 할지는 고민해야 할 거 같아요. 공도 처음에는 개인적인 재미와 욕심에서 운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적인 의무와 사명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지원금을 받지 않고 운영해도 주변 지역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주위에서 원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공개된 작업실이라고 해야 하나. 완전히 개인적이지만 폐쇄되지 않은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과 그걸 하는 군상이 너무 재밌어요.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만들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이 먹어서도 골머리를 써가면서 계속 쓸데없는 걸 만드는 게 너무 재밌어요. 개인적으로는 자기만의 실험이 있겠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보면 다 필요 없는 걸 만드는 거 아니에요. 심지어 에코백 들고 다니면서 그것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거니까, 너무 재밌어요. 조그만 공간이라도 하고 싶은 게, 일단 어떤 장소가 있어야 만나고 그동안 만든 쓸데없는 것도 보여줄 수 있잖아요.
최근 부업으로 들어온 일을 하느라 표암 강세황의 일대기를 읽고 있는 조병희, 문인, 예술가들과의 교유(交遊) 활동이 강세황을 예술가로 만들었다는 대목을 곱씹으며, 그는 마음 놓고, 유유자적 교유 생활을 이어가려고 한다. 청렴한 선비 같은 조음사, 그는 작업에 있어서 독고다이지만 타인을 관찰하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그의 사운드 리뷰는 그래서 작가의 작품과 함께 감상하면 좋다. 아니, 그의 사운드는 비어있으니까 듣는 사람이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도 좋겠다. 단, 이 삶에서 여유를 찾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이 쓸데없고 무효용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주용성 지알원 채정완이 참여한 [5월은 푸르구나](2021) 전시 광경
조병희는 1991년 5월 광주, 지금은 '운암대첩'이라 불리는 시위 현장에 진압 전경으로 차출된 경험이 있다. 당시 학생들에게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학생, 그리고 광주시민에 대한 미움이 전혀 생기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1980년 5.18 이후 태어난 젊은 작가들과 공유한 전시다. "Super Sad" 2번 트랙 "Song from May" 참고
이은정 개인전 [이.시.점] (2020) 전시 전경
공의 예술감독이자 작가인 이은정은 개인전 <이시점>에서 인물을 점으로 표시하고 선으로 이었다. 이에 착안해 멜로디 라인을 무시하고 점들을 이어 선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Super Sad" 6번 트랙 "This. Point.of.View", 7번 트랙 "MyeongDong"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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