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틈 (Loomed Crack)
오늘도 우리는 전시장에 왔다. 누구는 예술가들과의 지속적인 소통과 네트워킹을 위해서 왔을 것이고, 누구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고, 자신의 창의성과 영감을 얻기 위해서, 또는 문화적인 활동으로서 감정,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일 것이다. 각각의 이유와 목적은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온 우주에서 이처럼 경이롭고 강력한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작가는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을 기다리며 수 많은 낮과 밤을 달려 왔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작가 또한 전시를 하는 목적과 이유는 그 수만큼 다양하다. 작품을 보여주고 자신의 예술적 비전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위해, 아니면 작품에 대한 인정과 평가를 통해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그도 아니면 자신의 창작 과정과 작업 방법을 공유하고 예술적인 성장을 위해, 그 경계가 모호한 수많은 이유와 목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동을 쏟아부어 전시를 준비한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염원과 욕망이 교차하는 전시장에서 생각해 본다. 지금,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기쁨, 아름다움, 환희, 웃음, 우울, 분노, 두려움, 호감, 어색함, 흥미, 감명, 기대는 어디에서 오는가? 과장된 감성과 미학적 수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언어에 갇히기 전에 나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짙은 안개가 전시장 전체에 자욱이 깔린 것만 같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본 아름답고 경이로운 흰 구름을 바라봤던 경험이 떠오른다. 구름은 바라볼 수는 있지만 다가가면 그 경계는 흐릿하다. 멀리서 바라본 구름 표면은 경계가 명확하고 아름답지만, 구름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설수록, 공기는 점점 습해지고 시야는 흐려진다. 선명한 구름 표면은 어디로 간 걸까? 사라지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깨끗한 공기와 구분하는 ‘표면’은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적과 기억
가까이서 오랜 시간 이은정 작가의 작업 과정과 작품을 봐왔다. 가끔은 협업도 하고 조수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10년이 넘는 긴 시간이 쌓이다 보니 이제 이은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이 생겼다. 그동안 이은정 작가의 작품과 전시에 대해 나만의 감상과 해석을 음악이라는 언어를 통해 표현해 왔다. 이제는 그렇게 만든 음악도 목록(1)을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음악은 시간의 언어다. 시간성 없이는 표현될 수 없는 음악은 시간 그 자체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시간이란 주제에 관심이 많은 이은정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이라는 언어는 괜찮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시공간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은정 작가의 오랜 관심사다. 하나의 관심사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에 의구심이 들게 되고, 그 의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은 과학적 신념에 따라 그때그때 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패턴과 반복, 균형과 불균형, 조화, 기억과 흔적. 지금까지의 이은정 작가의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전시 안내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휘들이다. 그 잠정적 해답에 따라 이은정 작가는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라 할 수 있는 재료 활용의 일관성을 포기했다.
이은정 작가의 말대로,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은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대가의 꿈, 천재성, 예술에 대한 물신주의와 확신. 모든 과학적 진보는, 세상을 읽는 최고의 문법이 영속성이 아닌 변화의 문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저서 ‘The order of Time’에서 말했다.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희미한 이미지다. 우리의 눈은 세상은 지속해서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속삭이지만,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르겠다.
흐릿한 이미지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해 보면, 정지된 사물은 실제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도 부단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은 미시적, 거시적으로 그 실체를 볼 수 없으므로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경험을 조금만 유추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구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름의 실체가 흐릿하게 변하는 경험은 인간사 많은 일에서도 늘 겪는 일이다. 실체에 다가갈수록 그 경계는 희미해지고 흐릿해진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그 경계는 희미하다. 무엇을 지표로 삼고 누구를 스승으로 믿고 살아야 할지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푸념을 올곧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희미하고 흐릿한 실체를 보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히려 명쾌해 보이는 이유도 다름없다.
사이비 미디어와 유사 과학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지점이 바로 그 희미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고 있는 절대악과 절대선을 상정해 놓고 벌어지는 마녀사냥급 선동은 또 어떤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실체와 진실 사이의 희미한 틈에서 미혹에 빠진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먹잇감이 돼버렸다.
전시 [희미한 틈]은 이런 류의 대화에서 시작점이 있었던 것 같다. 무언지 잘 분간은 안가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는 무엇. 그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 결과물로 작품이 되었을지 과정 중에 폐기되었을지 알 수 없는 소위 ‘가왁구 캔버스’를 모아 엔트로피 역행을 꾀하고, 자본주의를 배반하는 노동과 수행을 통해 겨우겨우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희미한 이미지’라고 할 때, 누가 선뜻 이 일에 뛰어들 수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나는 그들과 늘 일상의 대화를 한다. 먹는 이야기, 가족 이야기, 세상 이야기. 허황한 이야기. 일상의 언어로 만나는 예술가는 좋고 편한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작품으로 내게 건네는 이야기는 일상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때론 과학자이고, 때론 철학자이며, 때론 성직자가 되는 그들의 언어는 희미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쓸모 있는 탐조등 역할을 하고 있다.
(1)
- 사람 한그루 (A Human-Tree) – 2013년 전시 “사람 한그루”
- 원더월 (wonderwall) – 2016년 전시 “wonderwall”
- 균형.불.균형 (Balance.un.Balance) – 2019년 전시 “균형.불.균형”
- 이시점 (This Point of View) – 2020년 영상 작품 “이.시.점”
- 명동 (MyeongDong) – 2020년 영상 작품 “명동”
- 보이지 않는 벽 (Invisible Wall) – 2019년 전시 “보이지 않는 벽”
- 주름진 시간 (Wrinkled Time) – 2021년 전시 “주름진 시간”
- 반복과 차이 (Difference and Repetition) – 2022 전시 “시간의 결”
- 시간의 결 #1 / 시간의 결 #2 (Texture de temps) – 2022 전시 “시간의 결”
- 선의 노래 (Line Song) – 2022 전시 “시간의 결”
- 누가 널 위로해 주지 (Who will comfort U) – 2022 전시 “시간의 결”
- 사라진다 (It’s all gone) – 2022 전시 “시간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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