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ng

Don’t play the Butter Note

 

임동현_마음풍경4_종이에 먹_162×130cm_2023

임동현_마음풍경4_종이에 먹_162×130cm_2023

 

 

오독.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와 오랜 시간 가까운 거리에서 허물없이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작품 외의 것들이 있다. 특유의 말버릇, 행동 패턴, 돌발적인 반응과 쉬 사라지는 감정의 여운.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 미약한 눈웃음, 속내인지 주정인지 모를 술자리의 이야기들. 작가의 사고체계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연관이 없을성싶은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은 수사 가득한 글을 통해서는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작은 화폭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손길이 닿아 있다. 작가의 수많은 손길이 만들어낸 하나의 그림은 소통이 가능한 또다른 언어가 되어,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결정과 수행이 담겨 있는 하나의 작품을 예리한 메스로 난도질해 가며, 그 수천수만의 결을 해체한 글도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이 난도질 된 조각들이 아닐 바에는 예리한 비평 글에 작가는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전시장에서 세상 사람과 만나기로 작정한 이상은 관객과의 상호 작용은 필수불가결이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며,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공유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해석과 분석은 주관적이며 다양한 시각과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이 해석과 분석될 때 오독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작품에 담긴 감정적인 결합이나 작가 개인적인 경험은 관객들에 의해 재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를 잘못 읽거나 이해하는 것을 최소한 방지하기 위해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와 전시를 주관하는 기관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우리가 쉽게 접하게 되는 작가의 인터뷰 영상이나 전시 소개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장에 마련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최소한의 지침일 뿐, 여전히 비언어의 시각예술을 이해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애당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 임동현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임동현 작가와 직접 만나 나눴던 대화와 2번의 필담을 기초로 작품 감상을 위한 작은 힌트를 얻는 정도로 이 글을 읽어 주시면 좋겠다.

 

 

 

자연.

 

“왜?”라는 질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고서도 사용하는 의문사다. 하지만, 오늘 점심으로 순댓국을 먹고 나온 사람에게 “왜? 순댓국을 먹었어요?”라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어느 순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돼버리기도 한다. 작은 화폭에도 수천수만의 손길을 요구하는 작품을 보고 ‘왜 이런 그림을 그렸나’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마찬가지 아닐까. 작업도 삶과 같아서 너무 사소해 그 이유조차 의미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의 작은 변화가 쌓여 있는 퇴적암과 같다. 임동현 작가의 이번 작품 연작에 한 겹의 퇴적층이 됐을 수도 있는 나와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임) 자연이란 무엇이며, 작품 활동 과정에서 자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탄생시키는 예술 작품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생성하는 과정 안에서 카오스와 질서, 우연과 필연의 관계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가는 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오만함조차도 ‘자연’이라는 거대한 질서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잔인한 자연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부서지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이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야 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이지요.

 

임동현 작가의 작업 태도가 닿아 있는 부분은 여기인 것 같아요. 꾸준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살아 있는 동안 행동해야 하는 일련의 가치와 윤리 규범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술가로서의 최소한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임동현 작가의 작품 활동에서 소재와 주제 측면에서 ‘자연’을 발화(發話)했다는 것은, 작가 본인에게 작업뿐만 아니라 삶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간이 사회 구조의 부조리에 관한 관심에 몰두하던 시기였다면, 이제 작업에 있어서의 메타인지(metacognition)와 성찰적 측면이 내적 세계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자기 자신이 인지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에 대한 좋은 힌트와 색다른 경험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자연-스스로 그러한 것’에 대한 관심은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임) 이번 창작스튜디오에서는 스스로 존재하며, 끝없이 스스로 생성과 변화하는 자연의 속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속성은 공생과 자율이란 의미로 사회에 가르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하에서 창작스튜디오에서의 주제인 자연을 제 작업에 적용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 속성의 의미, 자연의 형태, 자연의 특징을 반영하여 적용하려 합니다.

 

조) 자못 너무나 거창한 주제인 '자연'에서 '공생과 자율'로 문제의식을 좁혔다는 점은 임동현 작가의 작업 맥락에서 봤을 때 이해가 되는 점이 있습니다. 자연은 늘 자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조절하며, 그 안에서 다양한 종과 생물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에너지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작금의 기후 위기에서 더 절실히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이응노 창작 스튜디오의 위치는 도시와는 달리 이러한 자연을 늘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매력적인 위치인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의 의미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특히 임동현 작가가 말하는 자연 속성의 의미, 자연의 형태, 자연의 특징을 반영한 영감과 작업으로 연결도 당연한 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사회와 자연과의 관계는 복잡하면서 상호적입니다. 생태계의 안정성과 다양성은 인간사회의 안녕과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고요.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에 취하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임동현 작가의 가치관이나 작업 태도에서 봤을 때 조금 더 공론화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접근 방법도 고려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조의 대상으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이 자연에 미치는 여러 가지 영향은 부정적인 문제들도 분명히 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예술을 매개로 무게감을 공유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기록.

 

한식을 좋아하면 결국 좋은 쌀을 찾게 되는 것처럼, 임동현 작가는 지난 수년간 길에 버려진 나무토막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목공이 되려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나무라는 소재를 다양하게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은 배움의 자리라도 생기면 하루 반나절의 이동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나무를 깎고 자르고 문지르는 배움과 수행을 지속해 왔다. 이렇게 되면, 취미와 작업과 일상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 경계는 편의를 위해 정해놓은 무형의 그릇에 불과하다.

 

<우연·흔적·집적> 연작은 무형의 그릇에 담기기 싫어하는 작가의 일상과 작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작품에는 일상, 걷기, 기록이라는 3가지 측면에서 관심이 가는 작업이다. 걷기에는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능동적 의지가 있다. 그리고 걷기에는 그 모든 것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되는 지점에서 이 작품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예술에서 기록은 감정, 아이디어, 메시지, 그리고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보면 시작이자 끝이 기록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우연·흔적·집적> 연작은 하루하루 쌓여가는 기록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삶이 반드시 목표를 갖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흥미로운 힌트가 관객에게 전달된다면 어떨지 하는 생각은 든다. 걷기라는 일상적인 행위에 담긴 작지만, 소중한 의미를 거창하지 않게 기록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결과물에 담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빈틈은 작품을 보는 관객의 몫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소통에서 경청은 가장 중요한 태도이며, 경청을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임동현 작가가 산을 좋아하고 걷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침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언어는 말의 범위를 넘어서 있지 않던가. 이번 결과보고전은 임동현 작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 “Don’t play the Butter Note (버터 노트를 연주하지 마라)” 목표와 목적이 확실하다 보면 맛있고, 고소하고 뿌리치기 힘든 버터와 같은 음표를 연주하게 된다. 이 말은 허비행콕(Herbie Hancock)이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 있을 때 마일즈 데이비스 (Miles Davis)가 허비행콕의 연주를 조언하면서 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창의적인 뮤지션에 의존하는 밴드 리더 였기 때문에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 팀의 음악이 향상 된다고 생각했다. 음악, 특히 재즈에서 버터 노트를 연주하면 다음에 나올 음들은 한정적이 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이 어렵게 된다.

 

* [이응노의 집] 제6기 창작스튜디오 결과 보고전에서 '임동현' 작가의 작품에 부쳐

'go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아트홀 공  (4) 2025.03.25
희미한 틈 (Loomed Crack)  (3) 2024.07.07
MOVE! MOVE! MOVE! Largo  (0) 2023.09.19
OPEN PLAN OPEN PLAY  (0) 2023.09.19
돌아 온 악당  (0) 2023.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