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불일암에 갔던 때의 일이다. 땀이 좀 날 정도의 오르막길을 올라가자 암자 앞에 여기까지 온 사람을 헤아리는 듯 한바구니의 귤이 준비돼 있었다. 암자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손글씨로 이 귤로 목을 축이라고 써 있었고, 이네 귤 한쪽 만으로도 목이 시원해졌다. 사람의 마음씀은 그 사람이 사라져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듯 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헤아림이었다.
그 날의 마음을 담아 곡을 만들고 싶어 곡 제목을 ‘연꽃’이라 정하고 초안만 만들어 놓고, 곡 진행이 지지부진해 한켠에 미루어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김수미 작가와 김규 작가가 ‘기억의 기물’ 전시 준비를 하면서 공간투에 방문했다. 전시의 전반적인 준비 상황과 작업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안만 만들어 두었던 이 곡을 두분에게 들려드렸다. 처음 듣자마자 두분다 이번 전시에 이런 느낌의 음악이면 좋겠다 했고, 나는 이 곡을 진행할 의지와 추진력을 얻었다.
전시장 전체와 전시장 곳곳에 상영될 영상을 아우르는 곡으로 진행하면 좋겠다는 의견에 이견이 없었다. 이후 김수미 작가와 김규 작가의 작업 진행을 영상과 사진으로 전달받으며 곡을 만들어 나갔다. 영상의 흐름에 맞춰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음악 진행에 대한 신뢰를 받으며 작업을 진행했다.
곡 제목은 처음 생각했던 연꽃(Lotus)으로 했다. 전시의 컨셉과 비쥬얼을 염두해 두면서도, 송광사 불일암에서 느꼈던 숲길과 좋은 인품의 잔향도 잊지 않고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곡 전체 길이 42분 17초는 60분이 넘는 오리지널 에디션을 앨범에 수록하면서 다시 정리해 정해진 시간이다. 이것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전시장에서 전시를 감상하면서 듣는다면 지겨울 정도의 길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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